직업 적성! 구속받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사회생활|2019. 10. 9. 01:35

 

 

 

내 성격과 장점과 단점, 고쳐야 할까요?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틀린 답입니다.

 

이미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나를 내가 아닌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사람이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경험과 학습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가며, 또 나이 들어감에 따라 서서히 혈기가 식어가면서 변화해갑니다.
   
하지만 타고난 성품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동창을 수 십 년이 지나도 알아볼 수 있듯이 사람은 영원히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저 다소간에 세련되어질 뿐이죠.
   
"스스로를 알라"는 것이 선현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그만큼 스스로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스스로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기가 딱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만 15 세 무렵이고 또 한 번은 만 51 세 무렵입니다.
일생을 72 년에 비길 때, 18 년은 한 계절이 됩니다.

 

 

 

72년 이후의 삶은 여분이라고 여겨도 좋습니다.

다 살았다고 봐도 좋습니다. 

 


이런 일생을 한 해의 순환으로 환산하면 인생의 6년은 한 달이 됩니다. 그래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시기는 양력 4월 20 일경의 穀雨(곡우)인데 이는 15 세가 되고, 수확을 최종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시기는 10월 20 일경의 霜降(상강)은 51세가 됩니다.
   
즉 우리 인생에서 15 년이 지날 무렵은 곡우와 같고, 추수를 마무리하는 시기는 상강과 같으니 51 년 무렵입니다.
  
농부가 어떤 씨를 어떤 땅에 심을 것인지 결정하듯이 이 나이 무렵에 우리는 내가 어떤 품종이고 어떤 성질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을 모르는 나이이기에 어떠한 확신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이 어렴풋이 스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추측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름의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당시의 생각과 방향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특히 부모님들이 자신의 인생 경험과 가치관을 자녀에게 투영하기에 15 세, 그러니까 고등학교 제 1 학년 아이로서 자신의 막연한 생각, 실은 정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라본 결과 무엇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 즉 자신의 적성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물론 부모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문제나 금전적 성공에 대한 것도 있을 것이고, 자식이 고생의 길로 가기를 원하는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것은 자신들의 삶이었고, 자식의 삶은 또 다른 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대부분 적성을 처음부터 찾아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이후 진로를 택하게 되고 현실의 여건을 감안해가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좌지우지, 좌충우돌, 갈팡질팡이 그것입니다.
  
운이 좋은 자는 그런 대로 자신의 적성을 찾아가며, 적성이 아닌 길을 가다가 한참 나이가 들어서야 자신의 길을 찾는 이도 있습니다. 여기에 시대가 부여하는 유행이나 패션도 한몫 거듭니다.
  
15세 이후 36년이 지나 인생의 상강을 맞이할 것이니 51세 무렵이 됩니다.
이때 우리는 지나온 삶의 여정을 돌이켜보고 자신의 적성과 성격에 대해 그 실상을 정확하게 느끼게 됩니다.

 

 


  
상강 무렵 무서리가 내리고 천지가 차가워지듯이 우리 속에서도 열기가 빠져나갑니다.

갱년기란 인생의 상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온 길이 훤하게 내다보이면서 그것이 미혹의 길이었음을 느낍니다.

특히 15 세에서 51세의 중간 지점인 33세 무렵에 나 자신이 얼마나 들떠있었고 또 혼미해 있었는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무렵 정확한 자기 판단이 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기고 가정과 자녀를 잘 부양하면서 살다 가면 그만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세상에 처자식을 부양하는 일만큼 위대한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무렵, 냉철하게 자신을 판단한 결과 아직도 가슴 속에 뜨거운 정열이 남아있고 해볼 만한 일이 남아있다면 그 또한 가능합니다. 냉정하게 자신을 판단한 결과 얻은 생각이기에 승산이 어느 때보다도 높은 까닭입니다.
  
연륜도 있고 지혜도 뒷받침하니 애써 외면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이 때 새로운 인생을 열어보자는 판단이 섰다면 이제 남은 일은 다시 한 번 가능성을 확인해보고 결단의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노련할 때도 되었으니 말이죠.

 

 


   
오늘날의 삶은 과거와는 달리 인생 2모작이 가능합니다. 천하를 호령했던 나폴레옹도 이 나이에 죽었고 인생 오십을 노래하던 일본 전국시대의 명장 오다 노부나가도 이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의 무섭던 호랑이 임금 태종 이방원도 이 무렵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기에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송백은 겨울이 되어야 그 푸름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동양의 명언이 진실일 수 있는 때가 된 것이죠.
  
사람은 누구나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이 살고파 합니다. 특히 젊은이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구속받지 않는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구속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돈이 많으면 편할 수는 있지만 구속은 여전히 따릅니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타인을 부릴 수 있는 것이 권력이라 생각되지만, 그 또한 아주 유치한 생각입니다.

대통령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력이 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지낸다고 여길 수 있나요?
  
돈과 권력은 좋은 것이지만 만만치 않은 대가가 따릅니다.
살아있는 한 세상 어디를 가도 구속이 따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가끔씩 일탈할 수 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일탈, 벗어남, 이것이 좋은 것이고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일탈해버리고 아주 벗어나버리면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또한 진실입니다.
  
한 때의 여가, 그것은 몸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일에 뜨거워진 우리의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자양하는 시간입니다.
  
문제는 내가 쉬고 싶은데 쉬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 쓰는 법을 잘 익히면 됩니다. 흐름에 맡기고 흐름을 따라간다고 말입니다. 흐름을 따르다 보면 절로 어느 때와 장소에 가면 쉼을 만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죽음은 커다란 휴식이라고 동양의 고전 淮南子(회남자)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속받는 것 같아서 적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면 틀린 생각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구속의 연속입니다.

 

 

댓글()